변선생님을 보내며
처음 신학교에 들어가 정신없던 중에 제 관심을 잡아끈 것이 있었으니, 바로 교리사 과목이었습니다. 당시 교리사는 박대인 박사(미국에서 파송된 선교사)가 강의하던 시절입니다. 이분은 미국 사람이었지만 한국말을 기막히게 잘 하셨습니다. 그분 말에 따르면 자신은 꿈속에서도 한국말을 사용하신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박대인 박사의 유창한 한국말 교리사 강의는 신학 초년생인 제게 많은 자극을 주었고 어린 마음에도 나중에 교리사를 전공해 야겠다는 야무진 꿈을 갖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래 신학교 1,2 학년 무렵에는 '터툴리안'이니 '이레니우스'니, '에비온 학파'니 아타나시우스파'니 하는 단어들을 입에 달고 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가소로운 얘기들이지요.
그러다 신학교 3학년이 되었습니다. 1, 2학년 때까지는 주로 교양과목과 전공개론 과목들을 공부하다가, 3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집중적인 전공 필수 과목과 라틴어, 희랍어, 히브리어 같은 고전어 학습이 시작되었습니다. 본격적인 신학수업의 길로 들어선 셈입니다.
아마 기억으로는 토요일오전 강의 였습니다. 원래 토요일은 강의가 없는 날인데 이상하게 3학년 1학기에 오전강의가 있었습니다. 토요일 오전 첫 조직신학 시간이었습니다. 강의 시작 시간 10분이 훨씬 지나 옆구리에 잔뜩 책을 낀 교수님 한 분이 강의실로 들어 오셨습니다.. 그후에 제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변선환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변 선생님의 조직신학 첫날 강의는 칸트의 3가지 근본물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서구 정신사를 한바퀴 돌아 마침내 동양사상에서 그 한 단락을 지었습니다. 강의를 듣는 내내 가슴이 뛰었습니다. 제 안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불꽃처럼 튀었습니다. '바로 이것이다!' 새로운 깨달음이 전신을 짜릿하게 만들었습니다.
후에 교리사를 전공하겠다던 야무진 꿈은 진로를 바꿔야 했습니다. 박대인 박사께는 미안했지만 조직신학강의를 듣는 순간 진로는 교리사에서 조직신학을 선회하였습니다. 그 시간 이후로 터툴리안을 떠들던 제 입은 '불트만'이니 '틸리히, '본회퍼'를 선전하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날마다 도서관에 처박혀 혼자 미소지으며 저들의 책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 결과 조직신학회 학회장직을 맡게 되었는데, 우리 학회 지도교수가 바로 변선환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로부터 변 선생님과 특별한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선생님 지도하에 석사논문을 썼습니다. 대학원 2년동안 매학기 변 선생님의 세미나에 꼬박꼬박 참석했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학기 맨 마지막 세미나 시간입니다. 변 선생님은 늘 댁에서 마지막 세미나를 해대곤 하셨습니다. 그날은 아침 일찍부터 선생님 댁에서 모여서 점심을 함께 먹고 어떤 때는 저녁까지 먹으면서 하루종일 세미나를 하시곤 했습니다. 발제만 해도 5~6명이 맡아 준비했고 각 발제마다 토론이 있었으니, 세미나 마치고 선생님 댁을 나설 쯤이면 모두 파김치가 돼 있기 십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내놓고 나니 그것이 모두 학창시절의 즐거운 추억으로 남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도 변 선생님과 관계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지난 9일 새벽, 선생님이 부음을 들었습니다. 아직도 껄껄거리며 제 부족함을 받아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하지만 이제 선생님은 우리 곁에 계시지 않습니다. "삼가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1995. 8. 20.
문수산성에서 진광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