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의 교파에 대한 이해


조 병철 목사 (나단교회)

1. 서 론
2. 그리스도교의 탄생과 성장
3. 마르틴 루터 이후
4. 한국교회의 교파
5. 결 론

1. 서 론

그리스도교는 일반적으로 카톨릭(구교)과 프로테스탄트(개신교)를 모두 일컬어 사용한다. 점차 다원화되어 가는 이 사회 속에서 특히 그리스도교의 분파에 대한 이해를 통해 종교간의 대화와 상호 이해를 확대해 나가기 위한 지평으로 삼고자 한다. 그리스 도교의 분파문제는 단지 오늘날의 현상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2000년사상 계속되어 온 현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상호간의 정 죄나 이단시하는 풍조뿐만 아니라 일치(에큐메니칼) 운동을 향한 새로운 시도 역시 계속되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교내의 현실이다 . 그리스도의 교회는 본질적으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신앙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인간 속죄 사업을 통하여 하느님의 성령에 의해 완성되어져 나갈 하느님 나라를 향해 움직이는 하나요,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계승에 의한 교회이다. 우리는 그 리스도교의 분파적 현상은 하나의 "발전"인 동시에 "견해의 차이"에 있으며, 가능한 한 통합보다는 일치를 통한 그리스도교의 연대에 더 많은 공감을 가지고 있다. 현재 세계교회협의회(개신교협의체)와 카톨릭교회가 바티칸 Ⅱ 공의회문 서 발표이후에 새로운 교회일치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그리스도교의 분파에 대한 이해를 나누어 보고자 한다 .

2. 그리스도교의 탄생과 성장

그리스도교는 본래 유대인인 예수의 종교적 부흥운동에 의해 시작되었다. 예수의 또 다른 명칭으로서의 그리스도는 메시야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의 구세주란 말의 그리스어 번역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면서 그리스도의 정 신을 따라 사는 공동체를 그리스도교라 한다. 그 시대의 유대교는 보통 3대 분파로 알려져 있는데 첫째로, 천사의 존재를 부인하 고 영적인 부활을 부정하면서 정치적 세력으로 확장되었던 '사두가이파'와 천사의 존재와 부활을 믿으면서 말씀의 준수와 실행에 관심을 가진 일종의 평신도 운동으로서의 '바리사이파' 그리고 경건주의 운동인 에세네 파로 나뉘어져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초기의 그리스도교 지도자인 베드로는 무소속, 바울은 바리사이파에 속해 있었다. 그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종교적 회심을 통 하여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한 유대인 그리스도교 운동에 투신했고, 바울은 주로 소아시아와 그리스 지역의 전도를 통해 이방인 그리스도교 운동을 확대하였다.
초대교회의 교직은 감독, 장로, 집사로 나뉘었고 유사-그리스도교 집단들과의 교리적 논쟁과 로마제국의 박해 속에서 서서히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초대교회는 삼중적 핵심을 중심으로 발전했는데, 이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안디 옥-가이사랴 그리고 로마를 중심으로 발전해 나갔으며, 각 지역 학파의 입장은 어느정도 차이를 가지고 있었으며 독립적인 공동 체로 발전해 나갔다. 그후 로마의 공식 종교가 된 이전과 이후 여러 종류의 분파운동이 생겨났는데 이는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한 니케야 공의회를 통하여 교리적 일치가 이루어졌으나 계속해서 차이는 존재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동서가 정치적으로 갈라지게 되기 이전 칼케톤 공의회를 통하여 교리적 일치를 어느 정도 이루었다. 주로 교리문제는 그리스도의 신성 문제와 삼위일체론에 대한 것이 주제였다. 그래도 로마중심의 교리체계는 여전히 동방 그리스 측의 이해와는 거리 있었다. 더군다나 로마제국의 수도 인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수도의 이전으로 인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점차 분리해 나갔으며, 교리에 대한 이해가 언어의 차 이(라틴어-그리스어)역시 교회의 분리에 한 몫을 하였다. 그리하여 교리중심의 동방교회와 권위중심의 로마교회로 분리되어 졌다 . 소아시아와 로마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성장한 그리스도교는 점차 유럽 전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그후 로마 교황권의 강화로 인해 개혁적인 운동이 일어나 수도원 운동이 생겨났다.
회교도의 성장에 따라 예루살렘 성지 순례가 불가능해지자 십자군 운동을 일으켜 성지를 탈환하려하였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 고 이교적인 종파가 교회를 어지럽혔다. 그러던 중 도미니크은 경건심과 금욕생활, 열성과 학식을 갖춘 전도자들을 모아 수도원 운동을 시작하였으며, 사도적 청빈과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려는 프란시스코 수도원 운동도 시작되었다. 교황의 권위가 분리되고, 아비뇽과 로마의 두 교황이 생겨나게 되었고, 급기야는 두명의 교황이 지역에 따라 선출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플로렌스를 중심 으로한 문예의 부흥(르네상스)은 더욱 활발해졌다. 그러면서 민족주의가 부흥하게 되었고, 자국어로된 성경의 출판과 종교적 개 혁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3. 마르틴 루터 이후

종교적 개혁운동의 근본적인 원인은 교회의 행정지도자들의 과세와 성직자 임명에 대한 간섭 등이 주요한 문제였다. 마르틴 루 터는 95개조항의 반박문을 내걸어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면서 학문적 입장에서의 토의 제목으로 제시하였다. 특히 성베드로 대성 당의 100년공사의 지연은 면죄부의 판매라는 무리수를 저질렀고,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는 제후를 중심으로 교회의 분리에 앞장서게 되었다. 나아가서 뮌쩌는 직접계시를 주장하여 로마교회와 루터파를 모두 공격하였으며, 스위스의 즈빙글리는 종교적 권위를 교회공동체에 두었으며, 신앙에 의해 세워진 정부를 긍정하며 성서의 권위로 돌아가는 운동을 강조하게 되었다. 스칸디나 비아반도의 제국들은 루터파 교회를 지지하면서 왕이 감독임명권을 소유하게 되었다.
칼빈에 의해 제네바 중심의 자치적 그리스도교 운동은 점차 확대되었으며, 칼빈의 지위는 강화되었다. 그러던 중 즈빙글리의 개 혁운동이 너무 보수적이라 하며 아동의 세례를 반대한 재침례파가 등장하였고 이들은 루터파를 능가하면서 성장하였다. 그들은 7 신조를 채택하였으며 후에 침례교, 회중교회, 퀘이커파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영국의 개혁운동은 헨리 8세의 이혼문제로 교황권 의 권위에서 독립을 주장하며 영국국교회로 분리하게 되었다. 그후 엘리사벳 여왕에 의해 최고주권령이 발표됨으로써 로마교회와 는 완전히 결별하였다. 이 때 유럽교회는 로마카톨릭교회, 루터교회, 칼빈교회, 영국교회로 나뉘어졌다.
그후 쮜리히, 프랑크푸르트, 제네바 등지에서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 들어온 신교 지도자들에 의해 영국국교회는 구파와 신파의 대립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러한 회중을 중심으로한 그리스도교 운동은 결국 청교도주의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국교회의 박해로 인해 미국의 식민지역으로 피신하였다. 로마카톨릭교회에서는 특히 스페인의 이그나시우스 로욜라에 의해 창시된 예수회는 엄격 한 규율과 복종 훈련을 통해 예수의 군대가 되어 이단자들과 싸우기로 결심한 수도회였다. 영국국교회는 장로제도를 사용하였고, 후기에 감독제의 부활을 꾀해 아르미니어스 파를 부상시켰다. 그후 웨스터민스터 회의를 토하여 장로교-청교도, 회중교, 감독교 의 회의를 통해 국회에서 장로교회중심의 회칙를 통과시켰다. 그후 여러 회중 그리스도교운동이 일어나면서 영국에서 친구들의 회라고 불리는 퀘에커교회가 발전하였다. 로마카톨릭교회는 계속해서 여러 수도회들을 통하여 남미와 아프리카 지역으로 퍼져 나 갔다.
또한 동방정교회는 회교군주하에서 가혹한 곤란을 겪어야 했다. 일부 동방교회 즉 이디오피아의 교회, 인도 수리아의 교회, 수 리아 정교회 등이 로마카톨리교회와 연합하였다. 러시아 교회는 3분파로 갈라져, '고(古)신자파'-신부파, 평신도파, '평화주의파 '-카나다이민, 그리고 나머지는 신교의 선교에 의해 들어온 분파들이다.
근대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태양중심설을 발표한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은 사상과 신학의 일대 전환을 불러일으켰다. 자연법 사상 과 형이상학의 발전은 자연신론과 종교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낭만주의 사상가, 경건주의 사상가들이 발생하였고, 그들의 사상은 자유로웠다. 영국국교회의 목사였던 웨슬리 형제는 감리교회를 탄생시켰고, 유명한 부흥목사 휫필드는 영국과 미국에 종교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18세기 미국의 대각성운동으로 인해 개신교회가 성장하였는데 특히 유일신교와 아르미니안 사상이 강조되었으 며, 특히 감리교회와 침례교는 급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로마교회는 피어스Ⅳ 교황이 바티칸 제1공의회를 통해 교황의 무오류설을 가결하자 일부 신학자들과 지도자들은 고(古)카 톨릭 교회를 조직하고 얀센파 교회지도자들과 함께 분리하였다. 그후 볼셰비키의 혁명으로 동방교회는 종교적 탄압을 받게 되었 다. 동방교회는 그후 영국교회와 고카톨릭 교회등과 계속 연관을 가졌고 현재는 세계교회협의회에 가입되어 있다. 나아가서 각 교회들은 카톨릭교회가 바티칸 Ⅱ 공의회문서를 발표한 이후 활발한 연합활동을 하고 있다. 이 문서에서 교회일치에 대한 교령에 서 '크리스천들간의 분열은 모두의 범죄이며, 교리, 훈련, 조직에 있어서 구원의 신비를 잃은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표명함으로 써 새로운 일치의 시발점이 되고 있다.

4. 한국교회의 교파

그리스도교의 아시아 선교는 중국은 700여년전, 스리랑카는 500여년전 태국은 400여년전으로 대부분의 국가들은 오랜 선교기간 을 가지고 있으나 한국은 불과 200여년전에 지나지 않는 역사 속에서 급속한 성장을 가져왔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남한 인구의 20%가 그리스도교회의 신도임을 생각해 볼 때 급속한 성장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한국의 천주교는 한국인 자신이 외국에 나가 서 영세를 받고 교리를 연구하여 성격을 번역하여 자치적으로 복음을 전도하기 시작했으며, 토박이 신자들의 외부를 향한 선교요 청에 의해 들어 온 것이다.
천주교회는 남인계 학자들에 의해 서학이란 이름으로 연구되었고, 북경사절단인 이승훈은 그의 친구들에게 영세를 주어 신자들 과 교우들의 신앙생활을 영도하였다. 그리하여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가 들어올 때 약 4,000명의 신도가 이미 존재하였다. 천주교 회는 이념과 사회적 배경 그리고 정치적인 배경 하에 8차례의 순교자를 낳는 박해들 당하였고, 흥선 대원군 시기에는 대박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자발적인 성장은 그리스도교 전파사에 있어서 특이한 경우이다. 이와달리 개신교의 전파는 여러 선교사들이 들어오려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평안도 의주 사람인 이응찬이 목숨 을 걸고 중국선교사 로스목사와 만나 어학선생으로 또한 신자로써 동료들과 함께 성서번역의 일을 감당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에 서 이 수정은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들어가 신앙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아 미국성서교회의 성서 반포사업으로 한국어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그는 일본인의 선교를 반대하고 미국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였다.
일본 주재 감리교선교사 매클레이는 김옥균의 주선으로 선교와 병원사업을 위한 요청을 고종황제께서 받아들여 감리교의 선교가 시작 되었으며, 장로교회는 상해에 파송되어 있던 평신도 의료선교사였던 알렌이 공의자격으로 입국하였으며 자객의 의해 죽게된 민영 익을 살림으로써 인정을 받고 선교의 시발이 되어졌다. 이후 학생외지선교자원단에 의해 미국 YMCA, YWCA, 각 선교연맹들에 의해 선교가 본격화되었다.
특히 천주교의 선교가 양반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면, 개신교는 평민을 중심으로한 선교였으며, 학교와 병원을 앞세운 것이 개 신교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신교의 자유와 더불어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자 천주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하였다. 이제 열려진 신 앙의문은 점차 확산되기 시작하여 각 교파별로 전국적인 선교사 파송과 목회자 교육에 열심을 내기 시작하였다. 1900년대까지 연 대순으로 입국 정착한 교파는 미북감리교회, 미북장로교회, 호주장로교회, 영국성공회, 미남장로교회, 미침례교회, 미남감리교회 , 캐나다장로교회, 러시아 희랍정교회등이 차례로 들어오게 되었고, 단체로는 스코틀랜드성서공회ㅡ영국성서공회,미국성서공회가 들어오게 되었다. 그후 그리스도교인들은 우리의 상하의 차별과 문맹의 타파, 독립 의지를 강화하였는데 서재필은 YMCA의 기독 학생으로 독립협회의 주요인물로 독립신문 등에 자유와 인권 사상을 강조하였고, 남감리교회 교인 윤치호는 그의 사상을 높이 평 가하였다.
침례교회는 1890년 펜위크에 의해 들어오게 되었으며, 성공회는 1896년 서울과 인천에 교회를 설립함으로 시작되었고, 구세군은 1908년 호가드 정령의 서울 구세군영을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 복음 전도관이라는 이름으로 김상준, 정 빈이라는 두 사람에 의해 무교동교회로부터 시작되었고, 안식교는 1904년 하와이 이민도상의 손홍조와 하와이 개발공사의 임기반 이라는 두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미 선교부의 스미스 목사에 의해 본격화되었다.
1930년대 미 북감리회와 미남감리교회는 연합하여 한국감리교회가 되었으며, 감리교 목사인 이용도 목사의 신앙부흥운동에 의해 분파되어진 예수교회가 발생하였고, 하느님의 교회는 성결교 계통의 교역자들이 교단 세력 문제로 인해 창설되었으며, 한국인에 의한, 한국적 신학과 실천을 모토로 최태용 목사에 의해 복음교회가 탄생하였다. 장로교회는 박형룡 교수 중심의 장로회 신학교 와 자유주의 노선인 김재준 박사를 중심으로한 조선신학교 계열의 기독교장로회가 분리되었고, 한상동, 박윤선 목사를 중심으로 고려신학교가 세워졌다. 1958년 루터교회는 루터란 아워의 선교방송을 통해 선교를 시작하였다. 컨콜디아사를 창립하였고 베델성 서연구로 성서연구방법을 소개하였다. 장로교 44차 총회에서 진보파(세계교회협의회,WCC)와 보수파(국제기독교연합회,ICCC)의 대결로 인해 통합측과 합동측으로 분리되었고, 합동측은 고신측과 연합했다가 곧 분리되었다. ICCC는 교파내의 분열을 조장하였 다. ICCC의 재정지원을 받던 감치선 목사측은 대한신학교를 운영하다가 성경장로회(대신측)로 분열했으며, ICCC와 밀접한 관계 를 맺어오던 박병훈 목사측도 탈퇴하여 호헌파를 형성하였고, ICCC와 관계된 감리교 일부 인사들이 보수신학과 정통웨슬리주의를 부르짖으며 예수교감리회를 조직 분열하였으며, 성결교 역시 진리수호동지회가 발전하여 예수교 성결교회로 분리하였다. 그후 일부가 다시 결합되었으나 잔존 교회들로 예수교성결교회을 형성하고 있다.
현재 천주교는 국내에서 단일교회로 형성되어 각 지역별로 교구를 설정하고 교구별 본당과 공소가 있다. 개신교는 장로교의 경 우 합동, 통합, 합동보수, 합동정통, 기장, 고신, 대신, 보수합동, 총신, 협동 측등 가장 많은 교세를 가지고 있으며, 감리교회 는 주로 기독교대한감리회가 대다수이며 소수의 예수교감리회가 있다. 성결교는 기성과 예성으로 양분되어 있고, 침레교 역시 기 침과 예침, 성서침례교회 등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오순절 계통으로는 순복음교회, 하느님의 성회, 하느님의 교회, 오순절 성결 회 등이 있다. 기타 교단으로는 구세군, 그리스도의 교회, 루터교회, 복음교회, 나사렛교회, 대한성공회, 예수교회 공의회등이 있다.
이외의 박태선씨에 의해 세워진 대한 천부교, 문선명씨에 의한 통일교회, 권신찬 목사에 의한 장로교회, 영생교, 여호와 새일교 단, 세계일가공회 등은 유사 기독교집단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5. 결 론

우리는 이상과 같이 그리스도교의 여러 종파적 현상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교리상의 차이를 인정하기보다는 차 이를 무시하려는 데에서 문제점이 있으며, 더군다나 교리의 기초가 초대 그리스도교의 교리형성이 로마제국의 정치적 상황에 따 라 변형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언어와 사상의 차이로 인하여 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서 여러 교파의 분열은 순수한 직 무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주도권의 다툼과 욕심으로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반가운 사실은 아시아 신학자들에 의해 종교적 반성과 더불어 새로운 각성과 연대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는 데에 대하여 우리는 희망을 발 견하게 된다. 나아가서 이 땅에 자비와 선을 이루기 위하여 타종교와의 대화와 연대뿐만 아니라 영적 공사에 참여하며, 종교적 다원주의 현실을 긍정하는 인천 종교인협의회는 이러한 분파주의를 넘어 새로운 질서를 형성해 나가는 원동력과 시발점이 기대 하면서 이번 발제를 마치고자 한다.(인천종교인협의회 발제자료)